정치 인생의 출발점은 고향 울산이었다. 젊은 시절 울산 지역구의 최영근 의원 밑에서 청년부장을 맡았고, 이때 동교동계와도 친분을 쌓았다. YS와는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을 계기로 인연을 맺었다.
1970년 YS 대선 캠프에 울산 단합대회 지원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그는 김영삼계를 하지 않겠다며 맞은편 DJ 사무실로 가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1971년 8대 총선 출마는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측근 안경률 전 의원의 기록에 따르면 아버지는 출마를 탐탁지 않게 여겼고, 그는 가족의 도움 없이 인맥과 발품으로 선거를 치렀다. 울산·울주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공을 들이던 곳이어서 당선을 낙관하는 이가 드물었다. 그러나 YS가 “최형우의 당선이 곧 나의 당선”이라며 지원 유세에 나서면서 판세가 바뀌었고, 그는 36세에 국회에 입성했다.
첫 임기는 유신으로 국회가 해산되며 1년 4개월 만에 끝났다. 1972년 10월 유신 선포 직후에는 정보기관에 끌려가 YS의 자금줄을 대라는 추궁과 함께 고문을 당했지만 끝까지 버텼다. 이후 9대(울산·울주·동래군)와 10대(울산·울주)에서 잇따라 당선됐으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의원직을 잃었다.
정치활동이 묶인 1981년에는 김동영 전 장관과 함께 민주산악회를 꾸렸다.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가 출범한 뒤에는 간사장으로 실무를 총괄했다. 1985년 2·12 총선에서는 전국 지원 유세에 매달리다 정작 자신은 낙선했다. 1988년 13대 총선부터는 부산 동래구 을(13·14대)과 연제구(15대)에서 당선되며 부산으로 무대를 옮겼다.
1997년 신한국당 경선을 앞두고는 당내 최대 계파를 이끌며 유력 대권 주자로 꼽혔다. 그러나 그해 3월 11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조찬 모임을 하던 중 쓰러져 정치 무대를 떠났다. 부인 원영일 여사는 남편의 병을 유신 시절 고문의 후유증으로 여겨왔다. 원 여사는 30년 가까이 그의 곁에서 간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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