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령 울산과학대학교 치위생학과 교수

 때때로 나는 내게만 들리는 두 개의 목소리를 듣곤 한다. 주로 만나는 목소리는 늘 귓가에서 항상 나와 함께 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다. 

 몸을 움직이든 움직이지 않든, 어떤 일을 할 때조차 쉬지 않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심지어 길을 걸어갈 때는 ‘이쪽으로 걸어보렴’, 또는 ‘지금 횡단 보도를 건너는 게 좋을 거 같아’라는 식의 구체적인 정보를 일러주기도 한다. 하는 일들이 힘들게 느껴지는 순간에는 ‘무엇이 힘들어?’하며 슬슬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갑자기 ‘너는 조금 부족한 거 같아서 다른 사람들처럼 일을 척척 해내지 못하는구나’, 하고 고개를 숙이게 만들기도 하고, 일이 수월하게 느껴질 때는 ‘그래 네가 최고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실력이 부족하고 너만 잘하는 사람이니까 계속해서 더욱 노력해서 쭉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1년 365일 쉬지 않고 심지어는 꿈속에서도 들리는듯한 나의 목소리는, 나를 더욱 신중하게 행동하게 하고, 어려운 경쟁에서 이기게 해주기도 하고, 심지어 끝없는 노력으로 꿈을 이루게 해준 고마운 목소리다. 그런데 문제는 들을수록 목소리가 커지고, 사소한 일들에도 비판의 날을 세우는 순간들이 많아져, 가끔은 침묵을 원하기도 하지만 어찌 된 건지 이 목소리는 쉬는 법이 잘 없다.

 삶의 뜨거운 날을 보내는 순간들에는 이 목소리와 너무 가까워져 내가 목소리를 듣고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오히려 목소리와 하나가 돼 동시에 움직인다.

 그런 순간들이 이어질 때 즈음 목소리가 너무 커지고 강해져 멍해지는 순간, 내게 새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 두번째의 목소리는 그 이후로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들, 예를 들면 키 큰 나무들 사이에서 하늘을 올려다볼 때 조각조각 보이는 파란 하늘을 만나는 순간, 계절이 바뀌는 산들바람이 만져질 때, 추운 겨울밤을 지낸 작은 꽃봉오리가 방긋 웃으며 나를 바라볼 때, 아득히 멀리 보이는 수평선의 아름다움을 넘은 고요함을 바라볼 때, 철썩이며 오고 가는 파도 소리를 들을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의 이름을 불러줄 때. 언제 들릴지 예측할 수는 없었지만, 어김없이 필요한 순간이면 나를 찾아왔다.

 그런데 새로운 목소리는 예전의 목소리와는 다르게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잘 들리지 않을 때가 많았다. 예전의 목소리는 나를 위한다는 목적을 분명히 하고, 사소한 일들까지 나를 평가해 주고, 충고해 주지만 새로운 목소리는 내게 이야기를 전하기는 하는데, 어떨 때는 무슨 이야기였는지 이해되지 않는 적이 많아서 들을 때는 고요하고 침묵하고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목소리는 짧은 인사로도 긴 시간 나를 쉬게 하고 나를 위로해주며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주고 상처를 치유해 줬기에 나는 깊은 내면에서 시작되는 소리를 듣기 위해 더 자주 고요하고 평화로워져야만 했다.

 오늘도 나는 두 개의 소리를 듣는다. 물론 지금도 처음의 목소리를 더 자주 만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건네는지만 그래도 그 틈 사이로 조금씩 시작되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내면의 소리가 반복될수록 이제는 처음의 목소리마저 귀를 기울이기 시작하는 듯하다.

 고요한 순간이 오면 내면의 소리는 두 개의 목소리가 옳고 그름이 아닌 서로 다른 목소리이며, 결국에는 그 다름조차 다르지 않은 하나라는 이야기를, 반복되는 사계절처럼 그 순간에는 다른 계절로 나눠지는 듯 보이지만 지나고 보면 계속 연결된 계절처럼 우리는 모두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무엇이라고 조용히 들려준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순간들이 연결돼 쌓이면 고요한 삶으로 이어지는 평화의 호사를 누릴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언제 어디서든 복잡하고 시끄러운 목소리에 잠식되는 순간 나의 내면의 목소리가 있음을 기억하며 살아가고 싶다. 이가령 울산과학대학교 치위생학과 교수

저작권자 © 울산매일 - 울산최초, 최고의 조간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