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은 대한민국 산업화를 이끌어온 도시이자, 세계적인 제조 경쟁력을 가진 산업수도다. 자동차, 조선, 석유화학, 배터리 산업이 촘촘히 연결된 거대한 산업 생태계가 도시 전체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이 산업의 중심이 지금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경쟁의 무게중심이 설비와 기술력에서 데이터와 AI로 옮겨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제조기업의 경쟁력은 데이터를 얼마나 빠르게 수집하고, 표준화하고, AI로 전환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 수 있는지로 결정된다. 이것이 바로 지금 울산이 산업 전환의 갈림길에 서 있는 이유다.
최근 울산은 아마존(AWS)과 SK가 참여하는 대규모 AI 데이터센터 유치에 성공하며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다. 글로벌 클라우드 기업의 투자는 울산의 미래 산업구조 전환에 분명한 기회를 제공한다. AI 학습, 추론에 필요한 고성능 컴퓨팅 인프라를 지역 안에서 활용할 수 있고, 제조데이터 처리 속도와 분석 효율도 높아진다. 하지만 이것이 곧 ‘산업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략 없이 접근한다면 산업의 중요 자산이 해외 플랫폼 구조에 자연스럽게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즉, AI 데이터센터 유치는 기회인 동시에 새로운 위험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지금 울산의 가장 시급한 문제는 산업 데이터가 외국 플랫폼으로 흘러가는 구조를 차단하고, 울산 자체의 데이터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산업계에서 활발하게 논의되는 데이터 주권(Data Sovereignty)은 단순히 데이터가 해외로 유출되는 것을 걱정하는 개념이 아니다. 더 큰 문제는 산업 데이터가 특정 글로벌 기업의 데이터 표준, API, 클라우드 아키텍처에 맞춰 저장되고 처리될 경우, 이후 모든 산업 생산성과 공급망 관리 체계가 이들 플랫폼에 종속된다는 데 있다. 이는 곧 기술 주도권을 잃는다는 의미이며, 장기적으로 지역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울산이 지금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바로 울산형 산업 AI 생태계(Ulsan-AX) 구축이다. 기업별로 흩어진 데이터를 하나의 산업 데이터 스페이스로 연결하고, AI 알고리즘을 공동 개발, 학습할 수 있는 개방형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이는 단순한 IT 시스템 구축이 아니라, 울산 전체 산업 구조를 지능화된 생태계로 재편하는 전략적 프로젝트다. 울산형 AI 생태계 구축을 위해서는 산업데이터 표준화 플랫폼, AI 코파일럿 실증랩, EU 수출 인증 대응 구조 등의 구성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시대적 과제가 있다. 바로 글로벌 규제 디지털 제품 패스포트(DPP)와 탄소국경세(CBAM)다. 유럽연합(EU)은 2027년부터 수입 산업 제품에 대해 제조, 원자재, 물류, 탄소배출 정보 전체를 제출하도록 의무화한다. 울산의 자동차, 조선, 배터리, 석유화학 기업들이 유럽 시장을 유지하고자 한다면, 이제 단순한 제품 성능만으로는 부족하다. 공급망, 탄소, 원료, 품질, 배출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시스템, 그리고 이를 국제 규격에 맞춰 제출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이 필요하다. 이는 중소기업이 개별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운 문제이며, 지역 차원의 공동 대응체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환경 변화 속에서 울산은 중소벤처기업부의 ‘지역 주도형 인공지능 대전환 사업’ 공모에 선정되며 233억원 규모의 재원을 확보했다. 중소기업 AI 지원, 지역 AI 혁신 허브 구축, 컴퓨팅 자원 확충 등 다방면에서 의미 있는 시도가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AI 관련 여러 가지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일 뿐, 울산 전체 산업을 하나로 묶는 전략 플랫폼은 아직 부재하다. 즉, 개별 기관이나 기업 중심의 AI 프로젝트는 존재하지만, 울산 산단 전체 데이터를 통합하고, 이를 기반으로 산업 AI를 공동 개발하는 도시 차원의 마스터플랜이 시급하다.
이제 울산형 산업 AI 생태계, 즉 Ulsan-AX 프로젝트가 필요한 이유가 더욱 분명해진다. 이 플랫폼은 산업 데이터를 안전하게 보관하고 활용하는 도시 단위의 데이터 스페이스로, 독일의 Manufacturing-X나 Catena-X 모델과 같은 산업 데이터 공동체 구축을 목표로 한다. Ulsan-AX는 제조 대기업과 협력사, 연구소, 대학, 공공기관이 함께 참여하는 형태의 생태계로 설계될 수 있으며, 지역 기업의 데이터 주권을 보호하면서도 AI 경쟁력을 확보하는 울산형 전략 플랫폼이 될 수 있다.
특히 울산에 들어서는 AWS·SK AI 데이터센터는 울산 AI 생태계의 중요한 연산 인프라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위에 올려질 데이터 구조와 산업 표준, 즉 두뇌 역할을 하는 산업 데이터 플랫폼은 울산이 직접 구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울산은 데이터센터는 유치했지만 정작 데이터 주권과 산업 지능은 외부 플랫폼에 종속된 도시가 돼버릴 것이다. 데이터센터는 인프라일 뿐, 산업 생태계의 중심이 아니다. 중심은 언제나 데이터와 알고리즘의 주도권이다.
울산형 산업 AI 생태계 구축은 울산의 미래 산업을 위한 투자이자, 도시의 산업적 자립성을 지키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울산은 이미 거대한 제조 인프라, 축적된 공정 노하우, 그리고 AI를 적용할 수 있는 방대한 산업 데이터를 갖고 있다. 여기에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고 AI 기술을 지역 기반으로 전환한다면, 울산은 대한민국을 넘어 글로벌 산업 AI 도시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울산은 선택해야 한다. 글로벌 AI 기업의 플랫폼 구조에 의존하는 도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자체 산업 데이터를 보호하고 활용하는 자립형 산업 AI 도시로 올라설 것인가. 서정호 울산과학대 화학공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