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호 그림
배호 그림

4월은 비워진 계절이다. 겨울과 봄을 지난 창고는 작은 말소리도 울릴 만큼 빈 곳이 더 크고 공허하여 채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외려 마음에는 저절로 찾아드는 여유가 있으니 몰랐던 것, 잊었던 것들이 말을 걸어온다. 태화강 바람 속에 바다 내음이 묻어나고 송홧가루가 바람을 타고 안개처럼 흘러나오고 있으니, 이것이 눈에 보이는 향기가 아니고 무엇이랴. 이팝나무에 쌀알같이 열린 꽃잎만으로 보면 올 한 해는 풍년이 들 것이 분명하다. 나라님 성은이 크다 한들 배부른 풍년을 이길 수 있겠는가. 공무로 인한 고민과 번뇌만 아니라면, 올해처럼 보릿고개를 넘길 양식이 적당히 있어만 준다면, 그러한 가운데 울산에서 4월을 두 번 가질 수 있다면, 한 해와 맞바꿔도 좋으리라. 봄을 딛고 일어선 산과 들이 저마다 준비된 것들을 싹틔우고 여름과 긴 싸움을 준비하고 있다. 바람은 시원하고 아직은 날벌레가 꼬이지 않아 밤잠이 달콤하다. 글을 읽으면 글이 저절로 눈 안으로 들어오고 산책을 나서면 나무와 꽃들이 말을 걸어온다. 돌아갈 새들은 이미 떠났고 돌아올 새들은 남쪽 하늘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준비된 계절보다 먼저 찾아온 이가 있어 이 모든 평화는 단숨에 깨지고 말았다.

사시巳時 중엽에 형방이 살인사건을 고발하는 이가 있다고 하여 속히 반학헌 대청으로 나갔다. 봄기운이 완연하여 생명이 움트는 계절에 살인이라니, 좀 전까지 하필 도덕경을 읽고 있었기에 살인사건이라는 말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의자에 앉아 아래를 보니 건장하고 수염을 기른 사내가 온몸이 물에 젖어 옷이 착 달라붙은 채로 서 있었다. 여러 번 보았던 얼굴이었다. 우리 관아 소속 태화강 나루터의 진부津夫가 분명했다. 이름이 문순삼이라 했다.

"오늘 아침 밥을 먹다가 나루터에 인기척이 있어 바라보았더니 어떤 사내와 아낙이 보였는바, 사내는 검은 삿갓을 쓰고 아낙은 흰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어찌 된 영문인지 사공을 부르지도 않고 스스로 건너기 시작했는데, 강 한가운데를 지나던 중 아낙이 갑자기 물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사내는 물에 빠진 아낙을 구원하지 않고 남쪽 모래톱 언덕에 이르러 배를 대더니 급하게 뭍으로 도망갔습니다. 저는 다른 배를 저어 쫓았으나 남자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아낙이 물에 빠졌다 하지 않았는가? 남자는 차치하고라도 그 아낙은 어찌 되었는가?"

"당연히 남자를 쫓는 것보다 아낙을 구원하는 일이 급하여 빠진 근처를 배로 수색하였으나 찾지 못하였습니다. 남자가 뭍으로 달아나는 것을 목격한 이후부터 제가 배를 저어 아낙이 빠진 곳으로 다가갈 때까지 시간이 많이 소요되었습니다."

사공은 나루터에서 사건 현장까지 배를 저어가는 데 걸리는 시간이 만만치 않음을 두 팔로 길이를 재며 설명했다.

"두 사람의 자취를 물을 곳은 없사오나, 돈 삼십 문文이 든 파란 베로 만든 작은 보자기와 흰 모시 베 다섯 자, 다리 채 세 가닥, 겹저고리 한 벌, 해진 버선 한 켤레가 배 안에 떨어져 있었기에 이것을 바칩니다."

태화강 물에서 나와 예까지 오는 길이 짧지 않은 길이었음에도 그의 옷은 방금 물에 젖은 것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고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에 길을 재촉한 결과일 것이다.

"그리하면 물에 빠진 여인은 도저히 살길이 없단 말인가?"

"지체된 시간과 강물의 깊이로 보건대 제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여인은 익사하였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이제는 다만 시체가 물 위로 떠오르는 일만 남은 줄 압니다."

"빠진 지점을 아는 데도 시간이 지체되어 찾지 못했다니 안타깝구나!"

"빠진 곳을 알고 있음에도 쉬 찾지 못한 까닭은 강물이 본디 그 위는 고요해도 아래는 빨리 흐르는 일이 많습니다. 더구나 태화나루 위에는 용금소와 같이 물길이 돌아나가는 곳이 있는데 이런 곳으로 휩쓸려 들어가면 한동안 물 밖으로 나올 수 없으며 바닥에 이르러 다른 물길을 만나 매우 멀리까지 떠내려가기도 합니다." (계속)

 

#작가 소개 : 이호상 소설가

2014 『울산문학』 신인상으로 작품홀동을 시작했고, 2019 소설집 『젊은 날의 우화』를 냈다. 울산소설가협회, 한국소설가협회, 울산문인협회 회원이다. 이 작품은 다산 정약용의 부친 정재원(1730~1792)이 울산부사로 재임하던 1790년 실제 일어난 사건을 소설로 되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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